1912년 중화민국의 건국 시점으로부터 근대로 간주하여, 최근까지의 중국 도자기의 명암을 조망해보고자 합니다.
최근 중국사에서는 근대의 기점을 보통 함풍제 집권인 1850년부터 잡는데, 여기서는 도자기사이기에 20세기 초부터 시작해보겠습니다.
앞편에서 설명드린 천강채가 대세로 계속 이어집니다. 그러나 서양인들의 중국 진출 거점인 광동성(廣東省) 광주(廣州, 당시 영문 명칭은 Canton)에서는 광동 분채자기라는 뜻의 ‘광채자기(廣彩瓷器)’가 대량 생산되었습니다.
*광채 인물문 대완(廣彩人物紋大碗). 중국 광주시박물관 소장. 크기 미상. 위키피디아(https://zh.wikipedia.org/zh-tw/ 广彩) 자료사진. 많은 등장인물과 연지홍이 과할 정도의 채색, 곳곳에 금(金)채색, 여백 없이 빽빽한 구성 등이 광채의 특징으로 경질 자기이다. 내국인이 아닌 외국인에게 판매하거나 해외수출용 자기이다.
이 광채자기, 천강채는 당대에는 저렴한 도자기였습니다. 이러한 청말 도자기는 2000년대 초반기에는 중국 경매 시장에서 찬밥 대우를 받았으나, 서서히 가격이 오르기 시작해서 2015년부터는 억 단위로도 팔리는 것도 나오고 있습니다.
정확한 시기는 특정되지는 않지만, 독일에서 일본으로 간, 도자기용 인공 안료가 수입되기 시작합니다. 이를 ‘신채[新彩 또는 양채(洋彩)]라고 합니다. 광서제(光緖帝 재위 1875-1908) 때 수입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독일에서 화학이 본격적으로 발전하면서, 특히 방직과 의류 산업이 전 세계적으로 주요 산업으로 개발되면서 품질 좋은 인공 염료를 만드는 것이 화학의 핵심 주제였습니다. 그러한 화학의 성과 덕분에 1839년을 기점으로 ‘분자구조식 안료(structural pigment)’가 대량 생산되었습니다.
연지홍을 대신하여 분홍색을 내는 안료가 ‘서양홍(西洋紅)’으로 이는 산화제이철(Fe2O3)을 주재료로 만들었습니다. 산화제이철의 녹는점이 1550도씨이므로, 이녹는점을 낮추기 위해 납과 주석, 규산염 등을 첨가한 혼합 안료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이는 19세기 중반에 독일이 개발했습니다.
그보다 먼저 가장 중요한 도자기 안료인 청화[코발트]는, 프랑스 화학자 루이 자크 테나르(Louis Jacques Thenard, 1777-1857)가 1802년 1200도씨에서 코발트와 산화알루미늄을 혼합하여 ‘코발트 블루(Cobalt Blue)’를 만들었습니다. 크롬, 안티몬, 망간, 비스무트, 철, 코발트, 칼륨, 칼슘 등을 활용하여 다양한 녹색 계열, 황색, 흑색, 금채, 자주, 주홍, 주황을 만들었습니다.
이 신채(Xin Cai)는 도자기 태토에 칠한 색과 가마에 소성한 후 색상이 거의 같기 때문에 작업이 쉽고, 더불어 다양한 기법과 합성하기가 좋습니다. 특히 인쇄된 매개체와 잘 연결되어, 휠씬 더 다채로운 색상과 문양을 만들어서 도자기 산업에서 생산성을 높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대를 흐름을 따라 광서제(光緖帝 재위 1875-1908) 말기인 1903년 강서 순무(巡撫) 직책의 가봉시(柯逢時, 1845-1912)가 근대 민영회사으로써 ‘강서자업공사(江西瓷業公司)’를 창설하고 은 10만량을 자본금으로 독립 경영하도록 건의하였습니다. 그의 주청이 실현되기까지 7년이 걸렸고, 1910년에서야 설립되었으나 운영자금은 은 1만량만 지급되었습니다(중국 역사상 마지막 관요라는 보는 설도 존재). 더불어 강서 지역에 중국도업학당(中國陶業學堂)을 창건하여 체계적 도자기 교습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시장과 경매에 강서자업공사를 관지로 하는 많은 자기들이 출품되고 거래됩니다.
민국이 건국된 이후 쑨원도 강서 지역에 도자기 진흥책으로 강서도무국(江西陶務局)을 1929년 설립하고, 일본에서 요업으로 유학했던 열혈인사 두중원(杜重遠, 1898-1943)을 초빙하는 등, 일본의 요업을 배우면서도 경쟁하도록 유도했지만, 당시 중국의 상황이 녹녹치 않은 관계로 실패하였습니다.
특히 일본이 만주 점령의 첨병으로 내세운, 고도의 엘리트 복합체인 만철(滿鐵: 南滿洲鐵道株式會社)에서는 1906년 설립하자마자 다음 해에 중앙시험소(中央試驗所)를 만들면서 동시에 요업과(窯業科)를 산하에 두고, 요업을 육성하기 시작합니다. 만주 일대의 양질의 자토(磁土)와 가마 건축 원료 등을 치밀하게 조사하여, 찾아내게 됩니다. 그리하여 양질의 식기용 자기를 만철이 만주 지방으로 유통하여 시장을 장악합니다. 반면에 일본 본토에 있는 질 좋은 자기들, 사츠마(薩摩), 구다니(九谷), 히젠(肥前)들은 중국으로 들어오지 않고, 그 아래등급 도자기들이 수입되어 북방 지역을 상류층 시장을 석권하였고, 유럽의 자기들은 남방 지역을 장악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2024년 김은경 고대 교수의 “20세기 전반 일본의 만주지역 요업확장과 식민지적 운용” 논문에서 만철의 요업 역사가 소개되고 있으며 이를 참조하였습니다. 뛰어난 선구자적 논문인데, 아쉽게도 만철이 만든 도자기 실물의 사진자료가 없어 아쉬운 측면이 있습니다.
만철 요업을 요약하면, 민국 시대는 만철 요업조차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매우 낙후된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위 논문에서 언급되었고 매우 흥미로운 일화가 미주(尾註)에 소개된, 만철 중앙시험소의 요업 책임자로 1917-30년 동안 근무한 히라노 고스케(平野耕輔, 1871-1947)는 실제는 1908년 만철의 촉탁사원으로 만주 전역의 요업 재료들을 조사했으며, 1911년에는 유럽에서 비슷한 활동을 한, 근대 요업공업과 화학의 최고 전문가였습니다. 그는 만철에서 귀국하자마자 1930년 상무성의 요업시험소 소장으로 영전했으며, 정년 퇴직이후 모교인 동경공업대학(東京工業大学) 교수를 역임했습니다. 두중원도 여기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히라노 고스케는 만철에서 자신의 부하직원인 코모리 시노부(小森忍, 1889-1962)에게, ‘오늘날 과학이 발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중국도자기를 똑같이 만들 수 없음을 지적하며, 중국 도자기 유약 연구의 필요성을 피력했다’고 합니다.
코모리 시노부는, 만철이 중국 방자(倣磁:중국 모방 자기) 보다는 대량 생산 유럽풍 식기 제작에 집중하자 퇴사하여 1921년 만주 대련시(大連市)에 코모리도자연구소(小森陶磁器研究所)를 차렸습니다. 여기에 자신의 요장인 요아당요(匋雅堂窯)도 축성하고, 중국 도자기 유약과 채색을 집중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이 1937년 ‘노구교(蘆溝橋) 사건’를 일으키면서 중국을 침공하자, 그 여파로 도자산업도 전면 멈추게 되었습니다. 중국 공산당 승리 후에는, 경덕진은 색다르게 민관합동 집단생산체제로 개편되었습니다.
1948년 당시 경덕진은 150여개 전체 가마 중에 절반이 파괴된 상황이었고, 전쟁 전에 연간 3억개 생산량에서 90% 급감한 수준으로 폐허가 되었습니다. 동년 ‘중공부량지위(中共浮梁地委)’가 전체 생산시설을 몰수하고, 1950년 “경덕진시 건국자업공사(景德鎭市 建國瓷業公司)”를 설립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체 국영기업이 아닌 기존의 민간 도자 업자들과 느슨한 연합체 형식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이 회사를 1952년에 “경덕진 건국자창(景德鎭 建國瓷廠)”으로 개칭하고, 기술자 882명을 주축으로 연간 1400만개를 도자기를 생산하였으며, 명청시대의 고급 자기를 모방하는 이른바 ‘방고자(倣古瓷)’를 연구하고 생산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2010년대부터 크게 수집가들에게 인기를 끌게 되는 ‘건국자(建國瓷)’입니다.
이어 1956년 민관합동회사라는 틀을 유지하되, 중소 업체를 ‘10대 자창(瓷廠)’으로 통폐합시킵니다. 이리하여 1자창, 2자창 식의 명칭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것도 3년 지난 1959년, 숫자식 자창을 다시 통폐합하여 새로운 자창을 창건하되 호칭을 명사로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1, 4자창을 통합하여 ‘홍성자창(紅星瓷廠)’으로, 무려 5400여명의 가장 많은 기술자를 가진 ‘홍기자창(紅旗瓷廠)’은 6, 7, 9자창이 통합되어 성립되었습니다. 이 때 건국자창과 예술자창, 공예예술자창이 독립된 자창이 되었습니다. 그후 복잡한 명칭변경과 통폐합이 이어지지만, 10대 자창의 틀을 계속 유지되었습니다. 개혁개방에 맞추어 1995년 10대 자창들은 국영기업의 틀을 벗어나 독자 경영을 점점 변모하면서, 10대 자창은 해체되었습니다.
이 때의 50년대에서 90년에 중반까지의 도자기를 전체 아울러 부르는 명칭은 ‘567자(瓷)’입니다. 즉 50, 60, 70년대 생산된 도자기라는 뜻의 조어입니다. 2020년대 이후에는 엄청난 고가로 낙찰되는 경우도 많아, 중요한 도자기 분류로 정착되는 과정입니다.
1978년 등소평이 광동성 선전 등을 서방에 개혁개방하는 정책을 발표하면서, 중국도자기 자본주의 방식으로 급격하게 돌입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