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당, 시방 하나마나 한 소리 아닙니까?
중국 황제가 중국도자기를 좋아하는 것이 지극이 당연하지 않나요?
맞죠, 맞습니다! 그런데 강희제(康熙帝 재위 1661-1722)는 만주족입니다. 비록 교육은 중국 유교식으로 받았지만 말이죠. 도자기 이야기에 느닷없이 유교를 들고나오나 하시겠지만, 관련 있습니다. 그의 재위기간에는 유달리 종이, 붓, 먹, 벼루를 총칭하는 문방사우(文房四友)들이 대량으로 만들어졌는데, 붓대를 도자기로 만들기도 했고, 도자기로 만든 도연(陶硯)까지 유행했습니다. 문방구류들의 대표격인 도자기 필통도 많이 제작되었습니다.
그는 만주족으로 자신이 통치하고 있는 중국의 도자기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좋아했으며, 더 나아가 전조(前朝), 송, 원, 명의 도자기까지 좋아했습니다. 좋아해서 이를 재현하려 들었습니다. 이 행위가 중국도자기의 엄청난 발전을 가져왔으며, 또한 재현품 도자기가 광범위하게 퍼지는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우선 앞편에서 언급했듯, 강희제 집권 초기에는 반란에 직면하여 강남 일대가 피폐해졌고, 도자기 산업조차 힘들었습니다. 반란이 진압되고 천계령을 철폐하는 1680년대 중반에 이르러 경덕진의 어요창(御窯廠)을 본격적으로 재건합니다. 이 재건에 투입된 사람이 장응선(臧應選, 생몰미상)입니다. 문헌적으로는 1680년 경덕진 독조관(督造官)으로 파견되었으며, 함께 간 관리로 유원(劉源, 생몰미상)입니다. 유원은 한족인데 만주팔기군에 소속된 양홍기(讓紅旗) 출신으로 예술 재능이 출중한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감식안이 뛰어나고 조각에 아주 능했는데 그가 경덕진의 요와 전체 시설을 설계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장응선이 독조관으로 근무한 것이 1688년까지로, 이때 어요창을 ‘장요(臧窯)’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장요에서는 명나라의 오채를 완벽하게 소화하여 만들었으며, 담백한 색상의 다양한 색유(色釉) 자기를 만들었으며, 취홍(吹紅)과 취청(吹靑)이라는 새로운 유약 발색 기법을 발명하기도 했습니다. 장요 이후 저명한 독조관의 성씨(姓氏) 딴 요들이 계속 등장하면서 경덕진과 어요창이 엄청난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1677년 강희제는 도자기 굽에 자신의 연호를 쓰지 말라고 갑자기 지시합니다. 정확한 이유를 말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그때까지 어요창의 도자기 품질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합니다. 도공들은 어요창에서 제작한 도자기임을 표시는 해야하기 때문에, 대체 관지를 도입합니다. 약 4종류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쌍원관’ : 둥근 원을 두 개 그려 넣는 것
- ‘도기관(圖記款)/길상관(吉祥款)’ : 나뭇잎[秋葉], 여의(如意), 소라 고둥 외
- 궁정당명관(宮廷堂名款) : 자금성 내의 많은 전각들의 명칭을 딴 관지
- 방명대관(仿明代款) : 명 황제의 연호를 넣은 것. 특히 선덕, 성화제 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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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조(前朝) 황제 연호를 새겨 넣은 것은, 오인하면 왕조 국가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끔찍한 불경(不敬)의 죄목으로 처단될 수 있는 문제인데, 강희제는 아무런 제재나 금지 등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후대의 황제 치하의 어요창에도 이어져서, 전조의 ‘진짜’ 도자기와 ‘위조’ 연호 도자기가 서로 뒤섞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길상관의 경우 강희제 이전부터 1620-83년 사이의 ‘이행기 자기(Transitional porcelain)’에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어요창에서는 청조만의 독자적인 기형과 유색도 개발했지만, 멀리는 당나라와 송나라, 그리고 원과 명의 도자기의 유색과 기형을 전부 재현하고 더 발전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양선교사들의 입국으로 시작된 서양과의 교류에서 얻은 외국 도자 기술과 회화기술을 도자기에도 구현하여 소화했습니다. 그리하여 강희, 옹정, 건륭으로 이어지는 강건성세(康乾盛世, 1661-1796) 140여년 동안에 명품 도자기 백화점을 중국도자기로만 다 채울 수 있을 정도로 다채롭고 일급의 자기들이 대량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서양의 예술의 도입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연요(年窯)’라는 명칭을 얻은 독조관 연희요(年希堯, 1671-1738)가 보여줍니다. 연희요는 강희제 치하의 핵심 권신(權臣) 연갱요(年羹堯, 1679-1726)의 친형으로, 옹정제 초기에 연갱요의 숙청에도 불구하고 1726년에 정2품 내무부총관 겸 경덕진 어요감독(御窯監督)에 임명되었습니다. 내무부는 황제와 황실의 모든 생활을 책임지는 직책임에도 불구하고 경덕진에서 천하에 명품자기 생산에 매진하여, 서양의 칠보[법랑채]를 극상으로 발전시키고, 더불어 연지홍까지 국산화에 성공시킵니다. 그리하여 옹정제 시대부터 분채 자기가 중국 자기를 대표하게 되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낭세령의 서양화법에 대한 분석하기 위해 그의 도움을 받으며 중국식 산학[算學:수학] 방법으로 50여장의 그림으로 도해하여 10권짜리 저작 ‘시학(視學, 1729년 초간, 1735년 재간)’을 무려 30년에 걸쳐서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강희제에 창안된 핵심적 도자기 유형은 앞서 언급한 분채(粉彩) 도자기입니다. 분채 도자기는 기존의 오채(五彩) 안료에 산화물(酸化物)과 납 또는 주석을 섞고, 여기에 분홍색의 안료 연지홍(臙脂紅, carmine)으로 채색한 도자기를 말합니다. 연지홍만 빼면 오채가 사실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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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 제작된 분채 도자기는 전세품으로 수십점만 존재하며, 극히 희귀합니다. 분채 도자기는 옹정과 건륭제에 크게 융성하여, 오채 작품들은 시들해집니다. 이 분채의 강렬한 색상은 서구인들을 열광시켰으며, 일본에서도 환영 받았습니다.
강희제의 도자기에 대한 이러한 관점과 자세는 다음 황제 뿐만 아니라 장인과 일반 중국인들이 고도자(古陶瓷)를 대하는 태도를 결정하였고, 현대작가들의 방작들도 태연히 ‘대청강희년제’라고 새기는 현상-중국 외 국가에서는 찾기가 힘듬-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는 전통의 아름다움을 재현하는 것으로 말하며 ‘방고관(倣古款)이라고 부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