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방 국악기 그 ‘해금’ 아닙니다!
거의 반대 개념에 해당되는, ‘금지 또는 감금했다가 풀어준다’는 의미의 ‘해금(解禁)’이라는 용어가 너무 친숙해서, 해금령(海禁令)은 낯설게 느껴집니다. 명나라의 제1의 외교정책은 ‘해금’으로 외국과 외국인의 접촉을 강하게 금지하는 정책을 말합니다. 이것은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朱元璋 재위 1368-98)의 핵심정책이자 유훈으로 명이 망할 때까지 거의 이 기조가 유지되었습니다. 해금의 예외는 국가간의 공식 사신파견단에 의한 접촉만을 허가해 주었습니다. 영락제(永樂帝, 재위 1402-24) 치하에만 유훈이 무시된 적이 있을 뿐입니다. 어부가 조업하다가 우연히 외국배와 접촉했다면, 얼른 관에 ‘의도적이 아닌 우연히 접촉하게 되었다’고 해명과 보고를 해야 했습니다. 이를 어길 수 무조건 참형입니다. 명의 해금책은 조선으로 가는 명 이외의 외국인의 접촉도 차단하는 부수적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고려의 개방성과 조선의 폐쇄성은 스스로 추구했다기 보다는 외적 요인에 따른 현상이었습니다.
시방 도자사가 아닌 중국사 시간인가요?
얼른 도자사로 오겠습니다.
명의 해금 탓에 명과 조선의 민간 교류 내지 교역을 거의 전무했습니다. 그래서 명의 도자 기술도 조선으로 유입되지 않았습니다. 명은 이런 폐쇄성에도 불구하고 원에서 이어진 청화백자 기술은 극한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이 때가 선덕제(宣德帝 재위 1425-35)의 재위 10년 동안에 달성합니다. 또한 선덕제는 도자기 굽에 자신의 연호(年號)인 선덕을 써넣는 것을 용인하여, 이때부터 쭉 굽에 연호가 새겨지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사에서 황제의 연호와 칭호를 통일하고 재위 중에는 변경하지 않는다는 ‘일세일원제(一世一元制)’를 주원장 재위부터 정착되었기에 이것이 가능했으며, 이 제도는 청나라까지 이어졌습니다.
관지가 새겨지는 것은 중국도자기 중요한 차별점이 되었습니다. 이런 명의 관행조차 조선, 일본으로 넘어오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일본은 17-18세기에 자신들이 생산한 자기를 중국산 자기라고 위장하기 위해서 ‘대명성화년제(大明成化年製)’라는 관지는 자주 넣었는데, 자신들의 연호는 넣지 않았습니다.
또한 선덕제 시대 언저리에 오채(五彩), 투채(鬪彩)의 유상채(釉上彩) 기법이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명나라 도자기의 주요 기법이 되었으며, 이 기법도 명말(明末)에 일본으로 유출되었을 뿐, 조선에서는 이 기법을 전혀 시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이 기법은 일본은 물론 유럽으로 18세기 중엽부터 광범위하게 퍼져 조선과 한국의 제외하고 전세계 도자의 핵심 기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국은 조선이 하지 않았기에 현대 도예에서도 이 기법을 사용하는 작가를 필자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명나라가 자기 기술을 단단히 틀어쥐고 커다란 철옹성을 쌓아서 극동 아시아로 오는 길을 막았기에, 유럽에서는 왕과 귀족, 최상류층들은 자기(porcelain)에 대한 애호심과 호기심에 아주 강하게 상승했습니다. 필자는 유럽에서 자기의 희소성이 발생한 것은, 오스만제국의 존재와 명의 해금정책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쪽의 존재가 유럽이 소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극동아시로의 접근을 차단했습니다. 이것은 동남아시아가 자기를 발전시키는 길도 차단하게 되었는데, 14세기에 이미 자기를 만든 베트남이 명나라 중엽 시기까지 자기를 계속 만들었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명 만력제(萬曆帝 재위 1572-1620)부터 국운이 급격하게 기울고, 왜구의 노략질이 해안지방을 초토화시키자, 이 해금책이 점점 무력화되기 시작합니다. 강서(江西) 지방의 관요 도자기의 본거지 경덕진(景德鎭)도 생산체계가 붕괴가 진행되었습니다. 이 경덕진 기술자들은 밀수업자들이 득실거리는 남쪽의 광동(廣東)과 복건(福建)으로 내려가거나, 대만, 일본으로 퍼지게 됩니다. 1616년 포로가 된 조선 도공에 의해 일본에서 첫 자기가 생산되면서, 조선의 자기기술에 중국의 자기기술이 조합되면서, 유럽으로의 자기 수출이 성행하게 됩니다. 물론 자기의 유럽 수출은, 콜럼버스의 아메리카로의 항해로 시작된, 15-18세기까지 이어지는 항로개척시대(Age of discovery)라는 유럽인들의 전 지구적 항로를 개척한 것이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도자사에서는 이러한 명말과 청초 시기에 생산한 도자기들을 ‘명청 교체기(혹은 이행기) 자기’ 유형으로 분류합니다. 중국사에서는 이 시기를 명청교체기(明淸交替期, Ming-Qing Transition Period)라고 지칭하며, 이때 만들어진 도자기를 ‘교체기(이행기) 자기(Transitional porcelain)’라고 부릅니다 새로운 고유명칭을 부여할 만큼 이 시기 자기가 세계도자사에 끼진 영향이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에 대한 많은 도자사적 연구가 필요하며, 더불어 경제사, 정치사, 문화사 등과의 학제적 연구도 더 깊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명청교체기의 시작점을 1618년과 1620년 등으로 설정하며, 끝나는 점은 통일되어 1683년이라고 합니다. 시작시기는 어쨌든 만력제가 사망하는 시기점이고, 끝점은 강희제가 ‘삼번의 난(三藩之亂, 1673-81)’을 진압 이후 마지막 수괴가 사망한 1683년을 말하며, 그가 실행한, 남부 해안에서 내륙으로 무려 50km 지점까지 모두 소개(疏開)하는 천계령(遷界令)을 해제하는 연도이기도 합니다. 연이어 대만까지 점령하자 강희제는 천계령과 반대되는 전해령(展海令)을 1685년 반포하는데, 이는 바다로 나가 장사, 즉 해상무역을 적극적으로 장려한다는 정책이었습니다. 그래서 도자기의 제작이 중국 남부 해안 지역에서 아주 활성화되기 시작합니다.
극동 항로를 제일 먼저 개척한 포르투갈에 이어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등 연이어 동인도회사 같은 형태를 만들어서 극동으로 옵니다. 극동에서는 도자기를, 동남아시아에서는 향신료 등을 싣고 유럽으로 왕복했습니다. 이러한 북새통의 국제적 무역 전쟁이자 시장에서 쏙 빠진 한 나라가 있는데, 조선입니다!
유럽인들이 도자기 무역에 진심일 때 유럽인용으로 제작된 수출용 자기를 ‘크라크 자기(Kraak porcelain)’라고 하는데, 중국, 일본의 부가가치가 높은 수출품으로 유럽 전역으로 수출되었습니다. 용어도 도자기(ceramic)가 아닌 자기로 썼습니다.
앞서 언급한 존 포프(John A. Pope)가 터키와 이란, 영국, 미국을 샅샅이 조사하여 중국도자사를 새로 썼는데, 그는 일본도자기도 깊게 연구했습니다. 그가 만약 고려/조선도자사를 알았더라면, 그의 관점은 상당한 변화를 했을텐테, 세계도자사가 정립되는 1920-60년대 사이에 고려/조선은 일본보다 훨씬 낮은 단계의 국가로 변방 취급을 받았습니다. 동아시아 도자기사는 중국과 일본만이 언급되었습니다. 영문 위키피디아에서 중국도자사 다음 한국도자사 이어서 일본도자사를 언급하는 것은 필자가 기억하기로는 2010년대이후부터입니다.
명청교체기의 도자기들은 17세기 명나라의 양식에 바탕이되, 문양이 아주 단순, 조악, 이국적 등이 뒤섞여 매우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