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방 도자기 아카이브가 론칭하였습니다.

05. 중국학[Sinology]이라는 것이 시방 도자기와 뭔 상관입니까?

중국 도자기는 서양에서 학문적 연구와 수집의 대상이 되었으며, 대표 청자인 월주요와 고려청자는 최고 수준으로 발전했습니다.

별 관련이 없는듯 있는듯 한데요, 필자가 중국도자기를 공부할수록 저런 질문이 계속 나옵니다. 서양이 중국을 바라보는 안경은 도자기라는 도구였는데, 학문과 관련 없는 왕과 귀족, 상류층들은 그저 중국자기에 심취했지만, 이것이 학자들에게는 중국을 자세히 분석하고 이해하는 것은 큰 도전 과제였습니다.

1842년 영국과 난징조약, 1843년 영국과 후먼조약, 1844년 미국과 왕샤조약, 1844년 프랑스와 황푸조약, 1858년 텐진조약까지 총 5회의 불평등조약으로 유럽과 미국, 일본이 중국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1차는 조계지(租界地)를 통해서 합법적으로 광범위하게 중국도자들이 해외로 반출되었는데, 1911년쯤에는 세계 8개국이 중국 전역에 많은 조계지(租界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910년대부터는 도자기에 대한 전문 지식이 있는 전문가들이 요지 발굴하면서 중국 도자기가 좀 더 체계적이고 광범위하게 유출이 벌어집니다.

해외 유출 중국문화재를 30년 이상 연구한 진문평(陳文平, 1949-)의 2023년 저작 ‘집 떠난 국보(離家的國寶)’1에 따르면, 세계 47개국 200여 박물관에 167만건의 중국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최다 보유 박물관은 영국박물관으로 23,000여건으로 집계하고 있습니다. 그도 유출 시점을 아편전쟁 시기부터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1910년대부터 서양학자들이 중국의 자기의 역사에 대해 접근하면서 요지(窯址)가 과학적 방법으로 분석 연구되기 시작합니다. 유럽과 미국의 박물관과 대학, 개인소장자들이 중국도자기를 수집하게 되면서, 중국 본토의 고도자들이 2차로 해외로 반출되었습니다. 외국 전문가들이 주목한 것은, 자기의 시발점이 되는 월주요(越州窯)였습니다.

유럽의 중국학, 시놀로지(Sinology)는 철학과 문학, 번역이 중심이 되어 1814년 ‘프랑스대학’에 최초의 정교수가 임명되었는데, 독학으로 중국어를 익힌 쟝-피에르 아벨-레무사(Jean-Pierre Abel-Rémusat, 1788-1832)였습니다.

이때 요절한 아벨-레무사의 석좌교수직을 차지한 수제자가 스타니슬라스 줄리엥(Stanislas A. Julien, 1797-1873)입니다. 학문적 기만과 사기로도 악명 높은 인물이지만 그는 프랑스의 시놀로지 수준을 유럽의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려 놓았습니다. 그의 제자는 아니었지만, 석좌교수직을 이어받는 에마누엘-에두아르 샤반(Émmanuel-Édouard Chavannes, 1865-1918)이 유럽 최초로 1985-1905년에 걸쳐 사마천의 사기를 5권으로 번역하고 주석하면서2 이들이 프랑스와 유럽의 시놀로지를 선도했습니다.

줄리엥은 당대의 유럽 수집가와 연구가에는 매우 생소했던 도자기 관련 서적인, ‘경덕진도록(景德鎭圖錄, 1815년 刊)’3을 번역했습니다. ‘중국 자기의 제작 역사(Historie Fabrication et la Porcelaine Chinoise)’라는 제목으로 1856년 펴내게 됩니다. 시차가 약 40년 정도 벌어졌지만, 19세기 중엽이라는 시점을 고려하면 거의 동시대와 마찬가지입니다. 이 서적에는 정요, 여요, 관요, 용천요, 가요, 균요, 홍주요(洪州窯), 월요(越窯), 시요(柴窯), 등주요(鄧州窯), 건요(建窯)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유럽인들이 중국도자기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는 시기입니다.

에두아르 샤반의 제자 중에 한 명이 바로 실크로드를 탐험하고, 돈황(敦煌)에서 문서와 서적을 극비로 프랑스로 보내고는 자신은 책 한 권 달랑 들고 베이징으로 온 폴 펠리오(Paul E. Pelliot, 1878-1945)가 있습니다. 4세기부터 11세기까지 만들어진 책과 문서들은 약 5만권 정도 둔황에 보관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펠리오가 거의 핵심만 추려서 1만권을 프랑스로 반출합니다. 1911년 그 공로로 프랑스대학(The College of France)의 특별석좌 교수로 임명되었습니다. 1차 대전이 발발하자 펠리오는 북경 주재 프랑스 무관으로 복무했습니다.

1815년부터 1823년까지 8년에 걸쳐 완성된, 한영(漢英), 영한(英漢) 최초의 사전이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1782-1834)에 의해 완성됩니다. 이는 1716년 편찬된 강희자전(康熙字典)를 바탕으로 제작되었습니다. 현대 한국의 한자 발음도 강희자전을 준거(準據)로 하여 정조가 당대의 귀재의 이덕무(1741-93)에게 편집을 명하고, 완성된 이후에 왕실에서 툭하면 상으로 내려 방방곡곡 보급한 어정규장전운(御定奎章全韻)에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하여간 모리슨은 영국인으로 어릴적부터 비상한 기억력으로 칭송을 받았는데, 독실한 기독교도로 선교를 위해 중국에 갔던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중국에 대한 지적 전통하에, 영국 켄트주 출신의 내과의사 스티븐 부셀(Stephen W. Bushell, 1844-1908)이 1868년 북경 주재 영국공사관 내과의로 추천을 받아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연봉 600파운드를 받기로 한 부셀은 무려 23년간 북경에 체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의사보다는 언어학자이자 미술사학자, 화폐전문가로서 더 뛰어났는데, 실전(失傳)된 언어로 알려진 서하(西夏, 1037-1277)의 문자 탕구트(Tangut) 해독에 도전하였고, 또한 서하의 동전인 대안보전(大安寶錢)에 씌여진 37개의 문자를 해독하였습니다. 또한 여진문자, 요나라 문자, 팍스파(Phagspa)의 해독에도 도전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중국도자기에도 조예가 깊어 1883년 빅토리아 알버트(V&A museum)을 위해 233점의 중국도자를 구매를 대행하기도 하였습니다. 1900년 영국으로 귀국할 때, 중국 역사상 최고의 수장가로 알려진 항원변(項元汴, 1525-90)이 저술한 원본과 여러 고대 청동기, 고대 화폐, 두루마기 문서, 도자기 파편 등을 가지고 왔으며, 사후에 영국박물관에 기증되었습니다. 그는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의 중국도자기 전시회에 대한 유물 해설문을 쓸 정도로, 미국 전문가들의 중국도자학에 대한 이해를 넓혀주었습니다.

현재 중국학 관련 도서와 문서 등 약 150만점을 소장하고 있는, 하바드대학의 옌칭도서관(Harvard Yenching Library)4이 1928년 개관하게 되는데, 바로 그쯤이 미국 내에 중국학이 체계적으로 정립되는 시기일 것입니다. 이 시기에 하바드대에서 처음으로 일본과 중국 미술 과정을 개설하고 강의한 랭돈 워너(Langdon Warner, 1881-1955)가 중국학과 일본학의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그의 수제자는 제임스 플러머(James M. Plumer, 1899-1960)였는데, 그는 하바드대에서 아시아미술을 공부하면서 중국어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1923-37년 동안 중국 광동성 광주시(廣州市)에서 해외무역 관련 관세를 관장하는 중국의 해관총세무사(海關總稅務司)의 말단 관리로 재직했습니다. 공무원으로 재직하면서 그는 만주를 비롯한 중국 북부쪽을 두루 여행했으며, 업무 이외의 복건성의 건요(建窯) 발굴과 월주요 발굴에도 참여하였습니다. 귀국이후에는 스승 워너의 추천으로 옌칭도서관 산하의 미술관에서 큐레이터와 도서관 사무국장으로 일하면서 중국어 강사로도 활동했습니다. 바로 이 시기가 옌칭도서관이 세계적인 도서관으로 성장하는 시기였습니다. 플루머는 맥아더의 도쿄 총사령부에도 문관으로 복무하였고, 일본 미술사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는데, 스승 워너는 원자폭탄의 투하지 결정에도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옌칭연구소와 도서관을 중심으로 미국 내 중국미술사의 중심인물들이 거쳐갔다. 대표적인 인물로 중국 청화백자의 최고의 연구자로 꼽히는 존 포프(John A. Pope, 1906-82), 포프에 가장 깊은 영향을 끼쳤고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극동 미술부 학예사였던 앨런 프리스트(Alan R. Prist, 1898-1969) 등이 있습니다.

미국과 유럽이 중국도자에 먼저 집착에 가까운 애호를 보여주었고, 그후 19세기 말부터는 유럽은 일본 판화와 중국 회화, 그리고 미국은 옥(玉), 청동기, 회화, 고대문서류 등의 중국 골동품 전체로 확장되었습니다. 프랑스에서 중국미술품의 주제와 형태를 모방하는 유행을 일컫는 “쉬느와즈리(chinoiserie)”는 17세기 중엽에 태동했는데, 이는 중국도자의 유입에서 시작되었으며 이것이 19세기 후반기부터 유행하는 일본풍, “자포니즘(Japonism)”으로 이어졌습니다. 한국에서 인기있는 유럽의 도자기들 문양과 기형에서 쉬느와즈리와 자포니즘의 영향을 아직도 쉽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 유럽과 미국에서의 도자기에 대한 애호는 중국학과 일본학의 발전의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도자기류에서 초보자들도 제일 알아 맞추기 쉬운 것이 청자이고 반면에 전문가들도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청자라고 생각합니다. 쉽게 배워 입문하나 그 탈출구는 보이지 않는 것이 청자인데, 솔직히 고려 청자나 중국 청자도 감정하기 꽤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청자는 좀처럼 표면과 굽에 보통 ‘연대감 또는 세월감’으로 속칭되는, 기물이 오랜시간 시간이 흐름에 따라 표면과 굽에 색상이 변하는 등의 그 흔적이 보이는데, 청자는 좀처럼 그 느낌을 잡아내기가 어렵습니다.

청자를 세계에서 처음 만든 곳은 당연히 중국이고, 세계 최고급 청자를 생산한 것은 고려입니다. 고려청자를 능가하는 여요, 관요도 있다고들 하지만, 당대나 그 후대에 고려청자가 압도적 가치를 발휘했습니다. 신안 보물선에도 중국이 고려에서 수입한 고려청자가 일본인에게 팔려 그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청자의 역사가 바로 자기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1편에서 자기는 영어로 ‘porcelain’이라고 말씀드렸지만, 소문자로 쓴 ‘china’도 일반명사로는 자기를 의미했습니다. 유럽도자기 굽에 흔히 ‘fine china’라는 말이 적혀 있습니다. 즉 ‘중국’이 ‘자기’를 그 자체로 인식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럽인들에게 자기가 같은 위상을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중국에게 처음으로 ‘자기’를 만들어 준 정체가 바로 ‘청자’라는 말씀입니다.

그 청자는 월주요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선 어원부터 말씀드리자면, 청자의 ‘靑’은 한중일이 같게 사용합니다. 영어로 청자는 셀라돈(celadon)인데, 프랑스의 오노레 뒤르페(Honoré d’Urfé, 1568-1625)가 1608년경 쓴 ‘아스트레(Astrée)’라는 아주 긴 장편소설로, 주인공인 양치기 셀라동(Céladon)과 그의 연인 아스트레(Astrée) 이야기인데, 양치기 셀라동의 엷은 푸른빛 바지가 너무 인상적이어서 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제3차 십자군 전쟁을 막아낸 아랍의 대영웅 살라딘(Saladin, 1137경-1193)이 뇌물로 준 보화들 중에 도자기들가 있었다고 하여, 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로 나뉩니다. 프랑스에서는 하여간 17세기 초반에 이 용어가 등장하여 청자를 의미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아마도 청자와 녹색의 녹유(綠釉)도기와 차이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청자는 우리가 아는 녹색 혹은 비색의 청자만 청자일 것으로 생각하지만, 청자라고 부르는 도자기의 색깔의 스펙트럼은 아주 넓습니다. 청자를 판별하는 부분에서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차별점이 존재하게 됩니다.

중국 도자기의 전체 그림은, 오대 명요와 원청화라는 두 주인공, 핵심 조연은 청자가 받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월주요는 한대까지 그 생산년도가 올라가는 것은 맞는데, 중국의 발굴 성과에 따르면 춘추시대 후기(BC 5세기)에 청자를 생산한 유물을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항주시 북방에 덕청요(德淸窯)에서 완벽하게 시유된, 일종의 타악기인 청자경(靑瓷磬)이 발견되었습니다.5 월주요의 연구가 덕청요로 거슬러 올라가게되는 겁니다.

  1. 陳文平, 安風, 離家的國寶, 北京:中信出版社, 2023. 진문평은 상해대학(上海大學) 교수로 1988년 일본 유학 중에 일본박물관들 소장한 중국 유물 규모에 놀라 해외유출 문화재를 연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안풍(1989-)은 천진미술학원(天津美術學院) 학사, 중국예술연구원(中國藝術硏究院) 석사를 거쳐 현재 청화대학교 예술박물관 학예사로 재직 중이다. ↩︎
  2. Édouard Chavannes , Se-ma Ts’ien : Les Mémoires Historiques(Paris:Éditions Ernest Leroux, 1895-1905) ↩︎
  3. 남포(藍浦, 생몰미상)가 만든 책으로 6권으로 출판되었으나 태평천국의 난으로 출판자료들이 모두 파괴되어 그의 제자인 정정계(鄭廷桂, 미상)가 관련 내용을 첨부하여 총 10권으로 편찬하여 출간하였다. ↩︎
  4. 중국어로는 ‘합불연경도서관(哈佛燕京圖書館)’이다. 1928년 창설된 하버드-옌칭연구소[Harvard-Yenching institute(HYI), 哈佛燕京學社]의 산하의 중일도서관(Chinese-Japanese Library)으로 출발했다. HYI는 중국 북경 소재의 기독교 사립대학 4개 대학이 1915-20년 사이에 통합하여 만든 연경대학[Yenching University(燕京大學), 1919-1952]과 하버드대가 연합하여 아시아의 인문학,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고등교육기관으로 메사추세츠주의 캠브리지시에 설립되었다. 이 하버드-연칭도서관에 한국자료가 수집되기 시작한 것은 1951년부터이다. 중일 자료에 비해 23년 늦은 것이 미국의 한국학 연구 수준을 20세기말까지 미미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새옹지마(塞翁之馬) 고사의 본뜻은 행(幸)과 불행(不幸)이 서로 꼬여 있어 새끼줄처럼 이것이 풀릴 때 뭐가 행운이고 뭐가 불행이진 예측하기 어렵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 새끼줄 풀리고 있는 21세기에 한국, 혹은 미국에 어떤 결과를 만들고 있는지 앞으로 점점 명확해질 것이다. ↩︎
  5. 방병선, 중국 도자사 연구(파주:경인문화사, 2012), pp. 42~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