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방 도자기 아카이브가 론칭하였습니다.

04. 중국 5대 명요를 시방 알아보아요

자기와 도기에 대한 설명을 드렸으니, 자기의 본고장이자 도자 역사의 가장 중요한 중심축인 중국의 도자기 역사에 대해, 간략하고 실용적인 관점에서 설명 드리겠습니다.

자기와 도기에 대한 설명을 드렸으니, 자기의 본고장이자 도자 역사의 가장 중요한 중심축인 중국의 도자기 역사에 대해, 간략하고 실용적인 관점에서 설명 드리겠습니다.

당나라 도자기하면, 채색을 한 커다란 말 소조상이 떠오를 만큼, 당삼채(唐三彩)라는 고유 명사화된 단어가 우선 떠오릅니다. 3가지 색상을 칠하여 만들었다고 하여, 당삼채라고 불리는데, 이것은 자기, 석기가 아니고 도기에 해당합니다.

송나라는 예술사에서 북송과 남송을 반드시 구분하여 설명하는데, 이는 양자의 예술적 취향과 경향이 확연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북송은 문치(文治)가 극도로 발전된 형태를 보여, 결국 그것이 과하여 1127년 망국(亡國)으로 치닫았고, 남송 또한 북송의 정치적 형태를 극복하지 못하고 150년 후인 1279년 멸망합니다.

그러나 극성(極盛)한 문치의 송나라는 도자사에서 귀족적이며 문인 취향의 뛰어난 자기를 생산했습니다.
북송과 남송을 아우르며, 진귀한 명품을 생산한 다섯 개 가마를 5대 명요라고 부르며, 1990년 초부터 개혁개방으로 중국으로 누구나 입국할 수 있게되자, 중국인들과 외국인 모두 이 5대 명요 자기를 집중적으로 거래하려고 했습니다. 그런 현상이 내포하는 것은 초기 도자기 거래 시장에서 5대 명요와 원청화라는 것이 주요 거래 타켓이었다는 말입니다(원청화는 다음회에 설명). 즉, 이른바 옛도자기를 모방한 ‘방품(倣品)’들도 1990년대에 집중적으로 제조되었다는 뜻입니다.

5대 명요

5대 명요는 가요(哥窯), 여요(汝窯), 정요(定窯), 균요(鈞窯), 관요(官窯)를 말합니다.
핵심적인 것은 5대 명요는 관상용(觀賞用)보다는 실용성(實用性)에 중심이 있습니다. 이는 도자기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요소입니다. 후대로 내려갈수록 실용성 보다는 관상용에 더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가요

가요를 언급할 때 항상 신비롭다는 수식어가 따릅니다. 그것은 전모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중국도자사 저작자들이 조심스럽게 언급하고 구체적으로 파고들지는 않고 있습니다. 또한 여요에 묶거나, 관요에 묶어서 두리뭉술하게 서술하고 넘어갑니다. 그러나 현실 경매계나 시장에서는 가요를 입에 달고 다닙니다. 서로 알든 모르든 그만큼 가요 자기가 인기가 있다는 뜻입니다. 명대 최고의 서화가인 문징명(文徵明, 1470-1559)의 증손으로 박학다식하며 뛰어난 감식안을 가진 문진형(文震亨, 1585-1645)이 1621년 저술한 종합 골동 백과사전인 장물지(長物志)에 가요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이것은 명대 지식인들이 가요를 인식하고 있다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최초 기록은 원대 문헌이 있습니다. 원나라 후기인 14세기 중반에 공자 50세 손으로 알려진 공극제(孔克齊, 생몰미상)가 ‘정재지정직기(静齋至正直記)’에서 아주 간략하게 언급합니다. 가요는 청자로 분류합니다. 2017년 11월 북경고궁박물관에서 ‘가요자기전(哥窯瓷器展)’을 전시하였는데, 사실상 가요에 대한 연구의 주도권을 강화하려 한 것 같습니다. 중국 예술과 골동품에 전문 지식에 있어 대만의 영향력은 아직 막강합니다.

여요

사실 5대 명요에서 실질적으로 인기가 제일 높으며, 비교적 여요에 대한 전말이 알려진 관계로 경매도 활발하게 진행됩니다. 재밌게도 여요에 대한 가장 중요하면서도 최고(最古) 문헌은 우리에게도 친숙한 송나라 서긍(徐兢, 1093-1153)이 고려사신으로 다녀온 이후 1124년 보고서로 올린 ‘선화봉사고려도경(宣化奉使高麗圖經)’입니다.

여요는 당대에도 인기있었고, 특히 청나라 옹정제와 건륭제가 이 여요를 재현하려고 애를 쓰는 바람에 여요는 중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이른바 ‘방여요(倣汝窯 혹은 倣汝釉)’가 18세기 전반에 관에서 제조를 했다는 것입니다. 관련 요지는 1986, 1999-2004년 사이에 중대한 발견이 있어, 여요에 대한 풍부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요와 고려청자 사이의 밀접한 유사성에 대한 학자들 사이에 논의가 있는데, 당대에도 이미 선호도에 있어 쌍벽을 이루었습니다.

정요

정요는 우리에게 친숙한 것은 신안해저보물선에서 특히 정요가 대량 발견된 것에 기인합니다. 대형 접시 등등 겹겹이 포갠 상태로 온전히 발견되어 국내외 미술사학자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원래 백자는 당나라의 형요(邢窯)에서 처음 생산되었고 오대십국(五大十國)에도 이어져 이를 계승한 것입니다. 그래서 ‘북백남청(北白南靑)’이라고 북쪽은 백자, 남쪽은 청자라는 말이 생겼는데, 정요는 하북성(河北省) 곡양현(曲陽縣)에서 제작되었고, 청자는 강남 지방에서 제작되었습니다. 유약이 뭉쳐 흘러내린 부분이 기물들에게서 흔하게 보입니다. 기형도 우아하기 보다는 용도에 맞추기 위한 성형으로 보이고, 연질자기와 경질자기 중간의 경도는 갖고 있는 것이라는 개인적 소견이 듭니다.

여담이라기 보다는 중차대한 역사의 이면사로 본다면, 1922년 엽린지(葉麟趾, 1888-1963)가 처음 요지를 발굴했습니다. 엽린지는 만족 출신으로 1904년 관비 유학생으로 도일하여 동경고등공업학교(현 東京工業大學)에서 도자기를 공부하고 1909년 귀국하여, 예술연구소와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했습니다. 일본에서 근대 학문적 방법을 배워서 본국에 처음 적용한 셈입니다. 그의 아들은, 1977년 하남성 보풍현(寶豊縣)에서 세계 최초로 여요를 발굴했으며, 저명한 중국도자기 통사인 ‘중국도자사(2006년 刊)’를 쓴 엽철민(葉喆民, 1924-2018)입니다.

1941년 일본인 고야마 후지오(高山富士夫, 1990-75)가 더욱 세밀한 정요 요지를 발굴하였습니다. 이때는 중일전쟁 중이었습니다! 그는 1935년부터 중국 옛 도요지를 답사를 다니다가 정요를 발굴했습니다. 고야마는 당대에 최악의 입학 난이도 자랑하던 동경부립1중학교 출신으로 동경상과대학(현 一橋大學)을 중퇴하고 단기 사관학교 재학 중에 도자기에 관심을 두고 독학으로 도자기를 연구한 특이한 인물입니다. 당연히 그는 조선 도요지들도 답사했습니다. 전후 가장 저명한 중국도자 전문가이자 동아시아 도자사의 대가로 위치하며, 많은 저술을 남겼습니다. 고야마를 굳이 자세히 언급하는 이유는, 한국의 자기를 이해하려면, 중국과 일본 그리고 아시아, 유럽의 자기사를 동시에 견주어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야마는 동아시아 자기에 대해 처음으로 가장 현장감 있는 연구를 진행한 인물입니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과 더불어 당대 일본 지식인의 광폭 행보도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고야마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는 뜻이 아닌, 그저 냉정하게 그의 업적을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균요

균요(均窯)라고도 씁니다. 기이한 색상을 가진 청자입니다. 하남성(河南省) 여요를 만들던 지역에서 시작되었는데, 북송 시기에 요가 만들어지고 금나라(1115-1234)가 이 지역을 지배했을 때 더 번성하였고, 원대에서 전성기를 누리다가 명나라(1368-1644) 중엽에 폐요가 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러나 청나라 시절에 다시 인기를 끌어, 옹정제 시절 이를 재현했는데 이 시기 기물들을 ‘노균(爐鈞)’, 강소성의 의흥(宜興)에서 만든 것은 ‘의균(宜鈞)’, 청대 후기 광동성(廣東省) 석만요(石灣窯)에서 만든 것은 ‘광균(廣鈞)’, 근대에 노씨 가문이 만든 것은 ‘노균(盧鈞)’이라 불렀습니다. 1970년대 하남성의 우주시(禹州市)의 국가연구소에서 균요 유약을 개발하였고, 그것을 계기로 균요 방품을 생산하여 우주시에서만 2023년 기준 무려 220여만개를 생산했다고 합니다.

관요

조선 도자를 말할 때 ‘관요(官窯)’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일반명사로 사용합니다. 관에서 운영하는 가마 혹은 관의 주문품을 생산하는 가마 등의 뜻으로 사용되는데, 궁에서 운영하는 가마는 흔히 ‘분원(分院)’이라는 명칭으로 ‘관요’를 대치했습니다. 중국 도자사에서 ‘관요’라는 것은 고유명사로 사용됩니다. 실제 중국 관요 기물들에게서 ‘관(官)’ 관지가 많이 보입니다. 관요는 당나라 시절에 시작되었다고 보는데, 궁중을 위한 전용 가마로써의 역할이 아닌, 민요에서 공물(貢物)로 받았고, 아주 작은 관요 가마가 존재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천개 중에 10개, 백개 중에 1개를 궁중용으로 골랐다고 합니다. 당 초기 가마를 ‘경덕요(景德窯)’, 북송 초의 가마를 ‘추부요(樞府窯)’라고 합니다.

가장 중요한 관요는 남송 시기의 관요인데, 임안(臨安, 현 杭州市)의 봉황산(鳳凰山)에 설치되었던 요를 수내사관요(修內司官窯), 또다른 노호동(老虎洞)에 있던 요를 교단하관요(郊壇下官窯)라고 합니다. 앞의 요를 ‘구요(舊窯)’, 뒤를 ‘신요(新窯)’라고도 지칭합니다.

1930년에 항주 주재(杭州 駐在) 일본 영사(領事) 요나이야마 야스오(米內山庸夫, 1888-1969)가 교단하관요를 처음 발굴했습니다. 중학교를 마치고 중국으로 유학을 왔다가 일본 외무성의 외교관이 되었으나, 도자기 전문가는 아니었으나, 이렇게 중요한 관요 요지를 발굴하는 업적을 남깁니다. 또한 항주시에서 동쪽으로 약 110km 떨어진 월주요에서 생산된 청자에 대한 중요한 연구자이기도 했습니다. 1948년 퇴직 이후 도자기 관련 직업을 이어갔습니다.

1930-32년 걸쳐 중국 과학계의 태두인 주인(周仁, 1892-1973)도 항주시 오구산(烏龜山) 일대의 관요 요지를 발굴하기도 했습니다. 주인은 관비장학생으로 코넬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여, 야금학, 기계공학의 전문가였으며 동시에 세라믹공학에도 깊은 애정이 있었고 중국 고도자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근대에는 1985년 중국 사회과학원 고고연구실과 절강성 및 항주시 문물부가 함께 남송 관요 요지를 조사하여 관요에 대한 실체를 파악하였습니다.

필자가 요의 발굴 시기를 계속 언급한 것은 모두가 20세기 이후에 발굴되었다는 점을 알려드리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흔하게 보는 중국도자기 중 5대 명요 기물들은 여기 요 발굴 성과와 더불어 제작된 것으로 보면 타당합니다.

여기서 명, 청, 민국 시대에는 지난 왕조, 즉 전조(前朝) 시대의 도자기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가 아주 흥미로운 주제로 다가옵니다. 이 부분이 중국도자기 소장품 선택과 감정의 중요한 척도가 되는데, 흥미로우나 난해한 방정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