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출처: 서울공예박물관 (https://craftmuseum.seoul.go.kr/search/collection_materials_view/1533)
도기(陶器)와 자기(磁器)의 차이점(구별점)은 도자기 자체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적 기초로, 이 차이점(구별점)이 도자기의 본질을 파악하는 근본 요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양자의 차이를 잘 안다고 한들 뭐가 그리 대단한가’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도기에서 자기로의 이행은 일종의 문화적인 퀀텀 점프(quantum jump)에 해당합니다. 도기를 굽던 문화에서는 자기 굽는 방법을 외부에서 알아오지 않으면, 영원히 자기를 굽지 못합니다.
‘알았소! 설령 자기 굽는 기술을 몰라 도기만을 쓴다고 큰 일 나는 것이요?’라는 질문도 나올만 합니다. 도기와 자기의 차이는, 손수레와 덤프트럭, 삽과 포크레인, 말과 기차라는 문명 차이와 견줄만한 대사건이자 의미 있는 진화입니다.
도자기는 3분류 하는데, 그 내용은 서양과 동아시아가 차이가 있습니다. 이 차이를 잘 안다면, 해외 박물관 관람시에 명기된 영어 설명문을 정확하게 판독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서양과 동아시아와의 도자기에 대한 시각과 해석 차이도 느낄 수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동서양이 서로 통일된 의미의 용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짜증스럽게 들리지만, 현재 상황이 그렇습니다.
- 서양 : earthenware(토기/도기), stoneware(석기), porcelain(자기)
- 동아시아 : 토기, 도기, 자기
양측의 입장 차이를 살펴보면 한 가지로 압축됩니다. 석기(炻器 stoneware)를 분류에 넣느냐 넣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이 3가지 구별은 굽은 온도[소성온도]를 기준으로 하는데, 학계나 업계의 통일된 기준온도는 아니고 일반적으로 토기/도기는 1100도 이하, 석기는 1100-1300도 이하, 자기는 1250~1400도 사이로, 1400도를 넘는 자기는 특수자기로 산업용입니다. 석기와 자기가 사이에 온도의 교집합 부분이 있는데, 이는 특이한 석기가 높게 구워지는 경우 때문에 그 교집합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고온의 석기를 자기라고 부르지 않는 것일까요?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유약이 시유되었으면 자기, 시유되지 않았으면 석기로 구분합니다. 그렇기에 서양식 석기라는 구분법으로 동아시아 자기를 구분한다면 청자를 석기로 보는 황당한 일이 발생합니다.
석기라는 말은 일본이 “stoneware”를 번역한 단어인데, 한자도 석(炻)이라는 단어로 정했습니다. 즉 돌로 만든 도자기라는 뜻의 石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석기는 도기가 자기로 이행되기 전에 만들어진 도자기라는 개념입니다. 즉 도기보다는 뛰어나고 자기보다는 모자란 도자기가 석기입니다.
서양에서는 고려 청자를 석기로 분류합니다. 한국은 당연히 고려 청자를 자기로 분류합니다.
미국, 유럽 박물관에서의 유물소개에 흔히 고려청자를 ‘석기’로 구분해 놓았습니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매우 납득하기 어려운 구분일 것입니다.
세 종류는 일종의 계급으로, 우열(優劣) 개념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 지점이 중요합니다. 토기, 도기, 석기, 자기는 그 용어에서 우월, 열등의 차별요소가 흘러 넘칠 정도로 대량으로 담겨 있습니다.
토기는 모든 문명에서 제작되었습니다. 모든 문명에서 노천요(露天窯)라는 형태로 토기를 만들었습니다. 땅을 약간 파고 그 위에 장작더미를 올리고, 그 위에 기물을 올린 후에 그냥 그대로 불을 붙여 굽는 방식입니다. 이 방식은 아프리카나, 동남아에서 토기제작 방식으로 아직까지 남아있습니다. 이렇게 소성(燒成)하는 것의 최대치 온도는 섭씨 1000도 이하입니다. 이 온도도 부채 또는 풀무질을 계속 해야만 달성가능한 온도입니다. 이렇게 소성하는 것은, 도자기 표면에 산소를 계속 유입시키는 것이기에 이를 산화(酸化)소성이라고 합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화석연료를 태우면 가능한 산화라는 것을 역으로 진행할 때 이른바 인공성이 가미되고, 이를 과학기술 발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공기 중의 산소를 자연스럽게 태우는 산화소성이 아니라 찰흙으로 빚은 기물 몸체에서 오히려 산소를 뺏는 소성, 이것은 환원(還元)소성이라고 합니다. 이 환원소성에서 자기가 출현한 것입니다.
청자는 어떤 색상을 내는 재료, 이를 안료(顔料)라고 하는데, 이 안료를 전혀 첨가하지 않았습니다.
‘어, 청자가 녹색 내지 푸르스름한 색깔이 아주 분명하게 보이는데 어찌 색상을 내는 재료를 첨가하지 않았는 것이요?’라는 의문이 강하게 듭니다. 이 푸른 색깔은 환원소성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청자는 과학기술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과 한국은 청자의 출현 시기를 자국의 ‘자기(磁器, porcelain)’의 시작점으로 추정하는데, 중국은 당말에서 당초, 위진남북조를 거쳐 동한(후한, AD25-220)까지 점점 올려 잡아, 약 2000년 전에 자기 제작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국제 학계에서 그 시점에는 논란이 있으나, 중국이 자기를 제일 먼저 제작했다는 점에서는 이론(異論)에 여지가 없습니다. 그럼 두번째 제작 국가는, 이것도 이론에 여지없이 한국입니다.
청자 제작 시기를 통일신라말 9세기라는 의견도 팽배하지만, 이화여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려 성종 12년, 993년에 제작된 “청자 ‘순화4년’명 항아리(靑磁 ‘淳化四年’銘 壺)”를 기년작으로 계산하면 10세기에 자기를 제작한 것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북한이 이 항아리의 출토지로 추정되는 곳을 조사했는데, 1989-90년 사이에 황해남도 배천군 원산리 가마터에서 “‘순화3년(992년)’명 고배”와 청자 파편들을 발굴했습니다. 원산리에서는 4개 가마터가 확인되었는데, 1호 가마터는 도기 가마터, 2-4호는 청자 가마터로 확인되었습니다. 더 재밌는 것은 도기용 가마와 달리 청자 가마는 모두 벽돌로 만든 전축요(塼築窯)입니다. 이는 초기 고려청자는, 전축요로 만들어진 중국의 절강성 월주(越州)의 가마 축조술과 청자 기술을 도입하여 만들어졌다는 강력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요약하면, 환원소성으로 청자급 자기를 굽기 위해서는 가마[요]를 축조하는 기술이 필요하고, 이 특수한 가마구조를 통해 온도를 고온으로 올리는 것이 가능해지고, 환원을 조작하는 법, 또한 불기운을 다스리는 기법이 가능했다는 것이고, 이게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월주요 기술을 훔치는, 사오든, 등너머로 배우든, 기술자를 데리고 오든 그 어떤 방법을 통해 습득했다는 점입니다.
여하튼, 그렇게 자기를 제작했는데, 이것이 토기/도기, 석기만을 만드는 문화와 어떻게 퀀텀 점프(quantum jump)가 일어나는 것일까요?
논의를 더 좁히면, ‘자기냐 아니냐’로 귀결됩니다.
자기는 흡수율이 매우 낮습니다!
흡수율(吸水率 water absorption rate)이 0.5%이하야만 합니다. 이 수치는 현대의 자기의 기준점으로 옛 자기들과는 좀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하여간 흡수율이 매우 낮아야 한다는 겁니다. 0.5%라는 계측 기준은, 미국시험재료협회(ASTM)에서의 자기 타일(porcelain tile)에 대한 시험조건에서 제시되었습니다. 포셀린이라는 항목이 너무 다채로워, 자기 타일 항목으로 대신하는데 여기서는 자기 타일은 뜨거운 물속에 24시간 담그고 난 후에 무게를 쟀을 때, 0.5% 이하 무게가 증가했을 때 자기타일로 인정하는 시험조건입니다. 예를 들어, 200g의 타일을 실험했을 때, 201g 이하로 측정되면 자기타일로 인증 받는다는 뜻입니다. 미국 협회의 조건이 자기에 대한 세계 표준 조건은 아니지만, 자기의 흡수율에 대한 요업공학적인 조건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준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흡수율이 낮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세척의 편리함과 위생성에 있습니다. 자기는 기름이 묻어도 찬물에서도 쉽게 설거지가 되며, 그 잔존물이 쟁반에도 거의 흡수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중차대한 위생의 문제와 연결됩니다. 특히 전염병의 예방에 탁월한 효과를 발휘합니다. 전염병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먼 옛날로 갈 필요도 없이 2019년 코로나19로 우리는 너무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물론 고자기(古磁器)들이 0.5% 이하의 흡수율을 보인다고 단정할 수 없지만, 1976년 신안 앞바다에서 발견된 중국, 한국 자기들이 660년(1323년 난파) 동안 바닷물에 있었지만, 퇴색 조차 거의 되지 않고 완벽하게 보존된 것을 보면, 자기의 위대함을 알 수 있습니다. 바닷물과 그 안의 온갖 어패류, 미생물이 사물을 얼마나 부식시키는가는 아마도 뱃사람들이 처절하게 알고 있을 겁니다.
자기와 비(非)자기의 차이점은 분명하고, 비자기만을 가진 문화(문명)이 자기 제작기술을 획득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는 것은, 우리가 임진왜란이라는 대재앙적 전쟁이 일으켜던 일본에서는 ‘도자기전쟁’으로 불렀다는 것이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이에 대한 방증으로 볼 수 있습니다.
17세기까지 자기를 만들 제작기술은 없었던 유럽 지역의 맹주 프랑스는, 동방으로 간 카톨릭 사제를 통해 그 정보를 얻어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제작 비법, 오늘날로 말하면 산업기밀 정보가 당도하기도 직전에, 독일의 색소니(Saxony)와 폴란드 왕 아우쿠스투스 2세(Augustus II, 1680-1733)의 후원을 받아서, 1709년경 요한 뵈트거(Johann F. Böttger, 1682-1719)에 의해 자력으로 자기 제작을 성사시켰습니다. 그리고 다음해인 1710년 드디어 유럽도자기의 대표하는 제작사인 마이센(Meissen)을 드레스덴(Dresden)에서 창업하게 됩니다.
프랑스 예수회 소속 신부였던, 프랑스와 당트르콜(François Xavier d’Entrecolles, 1664-1741)이 중국 강서성 경덕진을 조사하여 자기를 만들 수 있는 비결이 바로 고령토(高嶺土)에 있다는, 이를 카올린(kaolin)으로 번역하여 프랑스로 보고하였고, 이에 대한 구체적 내용이 1712년 출간되었습니다. 당트르콜은 1698년 중국에 입국했으며, 1706-19년 사이 중국 예수회의 최고지도자인 총장(Superior General)으로 활동했습니다.
그의 편지 보고서는 예수회의 중국전도 책임자 신부에 의해 수집 정리되어, 예수회 소속의 저명한 중국 역사가인 쟝-밥티스트 두 할드(Jean-Baptiste du Halde, 1674-1743)에게 넘어가 1735년 “중국제국에 대한 해설(Description de l’Empire de la Chine)”으로 출간, 다음해에 바로 영역본도 출간되었습니다. 여담으로 이 책이 우리나라에게도 너무 중요한데, 여기에는 유럽 최초로 코리아 지도가 실려 있습니다. 코리아 지도는 마찬가지로 예수회 신부 쟝-밥티스트 레지(Jean-Baptiste Régis, 1663-1738)가 수집하여 알려준 정보였습니다.
여기서 고령토(kaolin)가 현대 화학식에 의거한 지식으로 유럽에 소개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럽인들에게 어떤 특별한 흙이 있다면 자기를 제작할 수 있다는 실마리를 전해준 것입니다. 그런 정보가 중국에서 넘어올 때, 유럽 열강들에게 드레스덴에서 독자적으로 이미 알아낸 ‘자기의 비밀 제조법’이 야금야금 퍼지고 있었습니다.
특별한 어휘도 생겨났습니다. ‘자기 제작에 관한 비밀 기술을 가진 직공’이라는 뜻의 ‘아케이니스트(arcanist)’입니다. ‘비밀’이라는 뜻의 라틴어 ‘아르카눔(arcanum)’에서 파생했습니다.
중국 자기 기술과 상관없이 연금술사의 마법으로 자기를 만들었던 뵈트거와 1719년 사망하자마자, 1705년부터 뵈트거 지휘 아래 자기 굽는 것을 돕던, 요 전문가(kiln master) 사무엘 슈톨첼(Samuel Stöltzel, 1685-1737)은 뵈트거에 이어 마이센 자기 책임자가 되어, 뵈트거의 ‘비밀’ 제조법을 모두 보았습니다. 그가 유럽에서 뵈트거에 이어 두 번째 ‘아케이니스트’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30대 여인을 혼전임신시킨 죄를 피하기위해 도망쳤다고도 알려졌는데, 결국 도망간 곳은 옆 나라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였습니다. 사생활 문제로 야밤도주한 슈톨첼은 드레스덴을 뜨기 전에, 요장의 가마를 파괴하고, 비법이 녹아있는 15개 흙덩이를 모두 오염시켜 뭉개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어찌 보면 악질적 인물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오스트리아 군대의 공식 대리인으로 활동하면서 자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 드렌스덴 기술자를 은밀히 접촉하고 있던, 클라우디스 두 파키어(Claudius I. du Paquier, 1679-1751)가 이 기회를 놓칠리 없었습니다. 금전과 주택 제공을 미끼로 슈톨첼에게 고령토를 납품받기로 하면서 1719년 마이쎈에 이어 2번째로 자기 생산에 성공합니다. 두 파키어가 만든 자기를 ‘비엔나 자기(Vienna porcelain)’로 부릅니다.
18세기 초 뵈트거부터 자기를 만들기 시작하면서도 그들은 중국의 의흥(宜興, Yixing)의 붉은색 차주전자, 이를 자사차호(紫砂茶壺)라 하는데, 이는 석기에 해당되나, 유럽은 이를 도기 형태로 만들어 재현했습니다. 언뜻보면 중국 것과 유럽 것을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사하지만, 석기와 도기라는 엄청난 차별점이 존재합니다. 의흥 자사는 석기임에도 약 1300도의 온도로 소성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https://sibang-art.co.kr/wp-content/uploads/2024/09/2880px-Meissen_Bottger_1935-1024x540.jpg)
아케이니스트와 예수회 신부의 염탐으로 얻은 정보를 기반으로 널리 자기 제작술이 광범위하게 퍼지고 이에 18세기 중엽부터는 각국에서 속속 자기를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18세기 말에는 궁정과 귀족층만을 위한 자기 생산이 아니라, 중산층과 빈민층, 해외 수출용으로 대량 생산을 위한 체제로 점점 나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자기 제작 기술은 18세기 말부터는 비밀의 영역이 아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