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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청화백자는 시방도 도자기의 꽃인가?

청화백자는 원나라 후기 등장 이후 동서양에서 사랑받는 대표 도자기로 자리 잡았습니다. 청화 안료 코발트는 중동에서 전래되었으며, 고온 소성으로 푸른빛을 발현합니다. 원청화는 소마리청을 사용한 초기 작품으로, 희소성과 예술적 가치로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조선의 청화백자는 세조 시기부터 제작되어 일본에서도 고소메로 알려졌습니다.

대답부터 해야죠, 예!
청화백자가 원나라에 13세기 말 혹은 14세기 초에 등장한 이후 쭉 도자기의 핵심적 유형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한국은 물론 전세계에서 현대 고급 자기로 꼽히는 로열 코펜하겐(Royal Copenhagen)의 도자기 대다수가 청화백자이라는 것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 청화 안료는 파란색이 아니라 탁한 검붉은 색입니다. 이것이 가마에서 고온 소성되어 아름다운 푸른 빛깔로 변화합니다. 그 푸른색 안료(顔料)가 코발트(Cobalt)입니다. 코발트 안료는 중동-구체적으로 이라크 내지 이란 지역-에서 첫 도자기 안료로 사용되었다가 몽골이 유럽까지 침공하면서 중국으로 전해졌다고 보고 있습니다. 코발트가 8세기 성당기(盛唐期)에도 도자기 유약으로도 이미 사용되었으나 도자기 안료로는 발전하지는 못했습니다.

순수 코발트는 은회색 광물인데, 경제적 가치 있는 일반적인 광물처럼 여러 원소들과 뒤섞인 형태로 암석에 존재하여 중동 사람들이 이를 어떻게 정제했는지도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이를 정제할 때 유독물질인 비소 증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코발트는 산화코발트(CoO)입니다.

코발트는 녹는 점이 섭씨 1,495도씨입니다. 1,300도씨 언저리에서는 절대 그 푸른 빛깔로 변하는 마법[소성(燒成)]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코발트를 안료로 쓰기 위해서는 여기에 녹는 점을 낮추기 위해 혼합하는 물질이 필요한데, 이것을 융제(融劑, flux)라고 합니다. 보통 융제는 납(녹는점 237도씨)을 주로 쓰는데, 이것이 인체에 유해합니다. 그래서 납 대신 주석(녹는점 231도씨)이 주요한 융제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주석유 도기(tin-glazed pottery)”라는 분류 명칭도 생겼습니다.

읽기만해도 머리 아픈 화학을 언급하는 이유는 코발트라는 도자기 안료를 ‘아름다운 푸른 색깔’로 발현시키기 위해서는, 현대적 의미의 과학기술이 아니더라도 동시대 최고의 과학기술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먼저 채색도기[파이앙스(faience)로도 불린다]는, 이베리아반도로 진군한 이슬람 무어(Moor)인들이 11-14세기에 유럽에 이를 들어왔습니다. 1492년 카톨릭교도들이 레콩키스타(Reconquista)로 이베리아반도를 점령한 이후 그곳에 눌러 살면서 기독교로 개종한 이슬람인이라는 뜻의 모리스코(Morisco)가 이슬람 양식과 기독교 양식을 혼합한 도안으로 만들어서 유럽 전역에서 인기를 끌었는데, 이 도기를 이스파노 모레스크(Hispano-Moresque)라고 합니다. 그후 15-18세기까지 이탈리아 르네쌍스 시대의 화가들이 화공으로 참여하여 수준높은 도안을 입힌 이탈리아 파이앙스[마욜리카(Majolica)로 불린다], 프랑스 화공 장인들이 만든 파이앙스 등은 현대 경매시장에서 고가로 거래됩니다. 도자기 위에 그려진 도안이 너무 예술적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캔버스 위에 그려진 유화와 비교하여 명도, 채도가 거의 똑같기 때문입니다.

좌) 접시[Dish(coppa amatoria)]. 1530년경. 이탈리아 카스텔 듀란테(Castel Durante, 현 우르비노와 페사로 지역 부근) 영지에서 생산되던 일련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사랑스러운 잔(coppa amatorial)‘이라는 주제로 생산. 현재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 주석유 도자기. 입지름 21.5cm[사진 퍼블릭 도메인]
우) 비너스의 탄생을 그린 마욜리카 접시(majolica plate depicting the birth of Venus). 1533년. 작가는 이탈리아 북부 로비고(Rovigo) 출신의 프란세스코 산토 아벨리(Francesco Xanto Avelli, 1487경-1542경). 현재 미국 LA카운티박물관 소장. 주석유 도자기. 입지름 미상. [사진 https://www.britannica.com/art/majolica#/media/1/358971/146661]

파이앙스에서 뛰어난 채색이 가능한 것은 낮은 온도에서 소성했기 때문입니다. 즉 고온에서 소성한다면, 화면에 보이는 안료들은 전부 휘발되어서 표면에서 날아가거나 녹아서 흘러내렸을 겁니다.

그래서 1200도씨 이상의 온도에서 버티는 채색 안료를 찾기가 몹시 어렵습니다. 중국에서 찾아낸 안료는 크게 3가지인데, 이것이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철화(鐵畵, 산화철), 동화(銅畵, 산화구리), 청화(靑花, 산화코발트)!

철화와 동화 모두 붉은 색으로 발현되지만 양측을 구별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는 않습니다. 철화는 녹슨 철을 긁어서 채취하여 안료로 쓰고, 동화는 구리인데 청동기 시절부터 덜 정제된 구리를 썼기에 이미 잘 알고 있는 재료였습니다. 청화만 특이하게 툭, 역사에 튀어나온 안료이며 가장 늦게 출현했습니다.

청화백자는 원나라 후기에 출현했습니다. 그래서 전문가 내지 수집가들은 이를 “원청화(元靑花)”라고 부릅니다. 이 원청화는 학술용어는 아니지만 재밌게도 한중일 모두가 함께 통용하는 용어입니다. 초기 원청화는 터키의 이스탄불 소재의 톱카프궁 박물관(Topkapi Palace Museum) 내의 두번째 정원과 이란의 북부 지방에 위치한 아르데빌 인류학 박물관(Ardebil Anthropology Museum)에 다수가 소장되어 있습니다. 원나라가 청화백자를 이쪽으로 수출했기 때문입니다. 중국 본토와 대만에도 제작 연대가 확인된 원청화는 극히 소량만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터키와 이란을 먼저 언급한 것입니다.

*위는 톱카프 박물관의 1950년대 초반의 ‘명(明) 자기(Ming porcelain)’ 진열 모습. 유럽의 귀족들이 과시용으로 중국 자기를 벽에 부착했는데, 여기도 같은 방식으로 진열해 놓은 것을 떼지 않고 그냥 그대로 둠[존 포프(John A. Pope, 1906-82)의 1952년 저작에서 필자가 캡처함)]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가 2008년 두번째 방한했을 때, 한국에서 100억원이상을 지불하는 한이 있더라도 원청화 진품이라면 구매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카더라’식의 이야기가 골동업계에 널리 퍼지기도 했습니다. 중국 본토에서는 구매가 어려우니, 중국과 가까운 한국에 원청화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라는 신통한 점쟁이 같은 해설도 곁들어져 퍼졌습니다. 도자기 수집가들 사이에서 원청화 한 점 소장하는 것은 꿈에서라도 이루고 싶은 소원 중에 하나입니다. 원청화를 소장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수집가들은 많으나 어느 누구도 공식적으로 인정받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원나라 청화백자의 청화안료를 ‘소마리청(蘇麻離靑)’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의 산지(産地)를 알아내는 것은 세계도자사에서 큰 난제입니다. 주요한 학설은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북쪽으로 125km 떨어진 사마라(Samarra) 지역이 압바시드 칼리파국(Abbasid Kalipahte 750-1258) 시대의 수도이거나 핵심 도시였는데, 여기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여기 북쪽에 코발트광산이 있었습니다. 이슬람 상인들이 여기에서 코발트 안료를 가지고 원나라로 들어가, 이슬람 맞춤 도자기를 주문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사라마지역에서는 당나라 시대의 연질백자인 형요(邢窯) 도자기가 발굴되기도 했습니다.

이 소마리청에 대한 최초 문헌기록은 명나라 황정일(黃正一, 생몰미상)이 41권 분량으로 1591년 출간한 백과사전류 서적, “사물감주(事物紺珠)”에 언급되는데, 청나라의 사고전서에도 편입되었습니다. 이 책에서 궁정용 도자기를 소마리청으로 장식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원나라부터 시작했다는 기록이 아닌, 영락제(재위 1402-24)와 선덕제(재위 1425-35) 시대에 번조했다는 기록입니다. 이 기록이 가진 함의(含意)는 원청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심도 있는 논의를 해야 할 문제인데, 이는 도자사 관점으로만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로 그냥 넘어가기로 합니다.

소마리청은 당시에 금의 몇 배 내지 몇 십배로 비싸서, 이것으로 도자기 위에 그림그리기에 실패하면 도공의 목을 잘랐다는 야사가 전해질 정도로 그 시대 제일 비싼 안료였습니다. 그래서 명 성화제(成化帝 재위 1464-87) 부터는 국산 코발트를 발굴하여 사용하는데, 경덕진이 있는 강서(江西)의 낙평(樂平)에서 제조하여 피당청(陂塘靑 혹은 平等靑)으로 불린 안료를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국산 코발트 안료인 석자청(石子靑), 회청(回靑), 무명자(無名子)까지 만들면서 소마리청 수입은 사라지게 됩니다.

*원나라 14c중반. 백자청화 능화문 팔각매병(白磁靑花 陵花文八角梅甁). 높이40.5cm(터키 톱카프박물관 소장). “2007년 제4회 경기도 세계도자비엔날레 ‘동서도자유물의 보고- 1. 중국,일본의 수출도자’ 도록 001”에서 필자 촬영. 소마리청의 색깔이 진하여 검푸르게 보인다. 몸체 전체에 꽉 채운 문양과 도안이 일품이다. 원앙 한 쌍이 연꽃이 핀 연못에서 노니는 모습[荷塘鴛鴦紋]이 정겹게 시문되어 있다. 여백 부분에는 당초문까지 빼곡하게 넣었다.

조선의 청화백자는 세조(世祖, 재위 1455-68)의 장모인 흥령부대부인(興寧府大夫人)의 묘지석에 청화를 1456년에 사용한 것이 첫 사례입니다. 조선시대 15, 16세기 청화백자를 일본어로 ‘고소메(古染)’라 하여, 일제강점기에 일인(日人)들이 무슨 수를 쓰더라도 구하려고 전국을 헤집고 돌아다녀, 이 용어가 널리 퍼졌습니다. 더불어 고소메 도자기가 희귀하다는 것을 깨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국 고도자기 수집가들도 간절히 원하는 소장품에 고소메 도자기를 꼽게 되었습니다.
원청화가 처음 등장한 이후 700여년간 동서양 모두 지속적으로 제작되고 폭넓게 사랑받은 유형이 자기는 청화백자입니다. 원청화, 고소메, 이렇게 도자기사에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