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방 도자기 아카이브가 론칭하였습니다.

下) 히젠(肥前)과 에도(江戶)시대 자기

4. 나베시마번(鍋島藩)가마와 오카와치야마(大川內山)

사가번의 초대 2대 번주인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勝茂, 1580-1657)가 1618년 번주가 된 다음해부터 아리타(有田)에서 자기가 생산되어, 점차 대량 생산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오시게의 부친이 세키가하라전투에서 이에야스측인 동군이 아닌 서군에 가담한 탓에 막부와 불편한 관계가 지속되었습니다. 이에 아리타(有田)에서 생산되는 작품보다 보다 격상된 기물, 막부에 진상할 자기를 만드려는 계획으로 탄생한 것이 나베시마풍의 자기라고 합니다. 즉 일반 판매용이나 사가번용일 아니라 막부에게 헌상할 목적으로 이 어요를 만든 것입니다. 그런 용도로 자기를 만든다는 것은, 자기 생산 연한이 지극히 짧은 상태에서는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었을 것입니다.

최초의 나베시마가마는 1628년경에 아리타(有田) 지역의 이와야카와치(岩谷川內)에 건설되었는데, 그 정확한 위치와 연차는 미상이고 그저 추정할 뿐입니다. 1661년 아리타의 난가와라(南川原)로 이설했다가 최종적으로 1675년 오카와치야마(大川內山)로 이전하였습니다. 한국인들이 큐슈로 관광가면 반드시 들리는 곳이 오카와치야마입니다.

  • 이마리나베시마가마 협동조합(伊万里鍋島焼協同組合)이 만든 오카와치야마 관광지도(출처 https://imari-ookawachiyama.com/#history). 좌우, 윗쪽이 모두 산으로 둘러쌓여 기술유출을 최대한 차단할 수 있고, 땔감을 얻기 유리해서 이 위치라서 선정되었다. 2010년대부터 점차 일본도 전통도예가 퇴색하고 있어, 위의 많은 가마들의 사업이 부진하다.

1952년 오카와치야마 발굴을 통해 발견된 자기편(磁器片)과 전세품이 일치하는 것이 많아, 확실하게 나베시마 자기들의 생산지가 오카와치야마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특히 나베시마 자기들은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어떠한 표식[관지]가 없어서 시대를 특정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또한 나베시마 자기들에 대한 번(藩)의 공식기록도 전무합니다.

야베 요시아키(矢部良明)[1]는 오카와치야마의 작품들을 시기별로 3단계로 구분했는데, 초기 1680년대까지, 황금기 1690-1750년대경, 후기 1750년경-1871년(폐번치현)으로 나누었습니다. 야베 요시아끼가 시기구분에서 첫 출발시점을 적시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아리타야끼와 나베시마야끼가 서로 혼재시기를 구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막부 말기의 기록으로는 나베시마야끼를 년간 5천점을 헌상할 정도로 독보적인 애호를 받은 것으로 사료됩니다. 나베시마야끼의 작품에 대한 이해는, 한중 도자사를 바탕으로 치밀한 분석을 통해 가능한데, 너무 복잡해서 생략하나, 일본 국보 작품 하나만 감상하겠습니다.

  • 일본 국보 중요문화재, 나베시마 청화오채 바위모란문 큰접시(鍋島色絵岩牡丹文大皿), 입지름31.0 높이8.3cm, 1684-1704년作(貞享과 元禄사이) ,  규슈국립박물관(九州國立博物館) 소장. 일본문화청(文化廳) 사진.

접시 작품은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일급 작품입니다. 우선 백색이 너무 순백의 우유빛깔로 깔끔하고, 뒤면의 청화의 색상도 아주 우수하며, 앞면의 청화와 유상채의 채도와 명도, 그리고 색상의 농담 처리 수법[일본에서는 이를 소메다(染濃)로 표현]이 아주 뛰어납니다. 굳이 두들겨볼 필요 없이 경질자기입니다. 특히 앞뒤의 백색표면에 검은 반점[철분성분]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이는 아주 품질이 좋은 태토를 잘 수비하여 사용했고, 유약 또한 일급이라는 뜻입니다.

일본에서는 굽이 높으면서 전 부분도 기울기가 높은 접시는 옛날의 나무접시와 닮았다하여 모쿠하이카타(木盃形)라고 부릅니다.

5. 구다니야끼(九谷窯)

구다니(九谷)야끼처럼 한국에 널리 알려진 일본도자기 명칭은 없습니다.

또한 구다니야끼처럼 논쟁거리인 가마도 없습니다. 구다니야끼의 변천사에 등장하는 인물 한 명 한 명이 다 사연이 있을 정도로, 이 구다니야끼를 중심으로 많은 도공들이 명멸했으며, 일본도자사를 풍성하게 했습니다. 한국을 비롯해서 해외에서도 일반인들에게는 일본도자기의 대명사처럼 여겨집니다. 물론 전문가들은 나베시마와 가케아몬이 일본도자기의 대명사로 여기겠지요.

구다니가마는 가가번(加賀藩), 현 이시카와현(石川縣)에 있습니다. 히젠과는 직선거리 690km, 에도(東京)와는 약 290km로 떨어진 북서 해안쪽 지역입니다.

가가번은 히데요시 정권의 핵심 가신인 5대노(五大老) 중 제일 유명한 마에다 토시에(前田利家, 1539-99)를 바탕으로 그의 장남 마에다 도시나가(前田利長, 1562-1614)가 초대 번주가 되었는데, 도시나가는 아버지와 달리 도쿠가와 이에야스편에 가담하여 번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도시나가의 아들 마에다 요시츠루(前田利常, 1594-1658)가 2대 번주가 되었으나, 1639년 스스로 은거의 삶을 택하는 탓에 3대 번주 마에다 미츠나카(前田光高, 1616-45)가 승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회 참석 중 급사하여  3살에 불과한 아들 마에다 츠나노리(前田綱紀, 1643-1724)가 4대 번주를 물려받았습니다. 츠나노리는 유아기에 집권한 인물답지 않게 노련한 가신단과 협력하여 뛰어난 관리능력과 적절한 정치적 처신을 보여, 100만석에 가까운 다이묘로 번을 성장시켰습니다. 막부측에서의 가가번의 지속적 융성과 치밀한 행정 능력에 감탄했다고 합니다. 현대까지도 가이시카와현은 100만석 다이묘였다는 자부심을 계속 현창(顯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마에다 가문에 대해 설명드린 이유는 2대 번주 도시나가에서 4대 번주 츠나노리까지, 1655-1700년경 사이에 구다니야끼가 존재했는데 이를 ‘고쿠다니야끼(古九谷窯)’라고 부릅니다.

가가번은, 금은세공을 하는 150석 하급 번사(藩士) 집안 출신인 고토 사이지로(後藤才次郞, 1634-1704)를 사가번 아리타지역으로 보내 자기 제조 기술을 습득한 후 귀환시켰습니다. 또다른 설로는 고토가 명나라로 가서 기술을 배우고 귀국할 때 명나라 도공 몇 명과 귀환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하여간 그가 1655년부터 자기 제조를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1970-71년에 걸쳐 이시카와현 가가시(加賀市) 구다니정(九谷町)을 발굴한 결과 ‘1호, 2호요’를 확인하였고, 이 때 양식을 ‘고쿠다니양식’ 또는 ‘초기이로에(初期色繪)’라고 합니다. 현재 국가 사적지로 보호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고쿠다니 존재여부에 논쟁이 마무리되는 것은 아니고, 아리타(有田)야끼와의 관련성은 더 심도 높은 연구가 필요합니다. 1945년에는 고쿠다니 자기를 아리타에서 모두 소성했다는 과감한 주장이 설득력 있게 제시되었습니다. 양쪽 모두 소성했는지 여부도 잘 알 수 없습니다. 고쿠다니요가 존재하기는 했으나, 우리가 아는 고쿠다니의 명품은 소성하지 못했고 그저 단순 자기만을 생산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하여간 고쿠다니가 중요한 점은 유상채 기법을 시작한 것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고토 사이지로가 당대 최고의 화가가 구스미 모라카게(久偶守景, 생몰미상, 1670년대 중반까지 생존)에게 사사 받아 도자기 화사 역할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구스미는 가노파로 당대 유명 화가로 현존하는 작품이 약 200점 이상입니다. 그의 가리개 작품 ‘지본담채납량도(紙本淡彩納涼圖. 도쿄국립박물관 소장)’는 일본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구스미를 초빙했다는 것은 번의 강력한 후원과 지휘가 있었다는 강력한 증거로, 4대 번주가 아직 청소년기인 시절이라서 번 저(藩邸:번주의 거주 및 집무실) 주요 지도부들의 강력한 지원과 혜안이 있었습니다. 가가시는 이미 2대에 120만석이 넘는 강력한 다이묘가 되었고, 3대 번주는 의도적으로 20만을 친족에게 떼어주고도 100만석을 유지했고, 4대 번주 시대에는 더욱 행정, 산업, 문화 측면에서 더욱 융성했었습니다.

가노파(狩野派)는 무로마치 중기부터 막부 말기까지 400여년간 이어진 회화 유파입니다. 가나파의 조종(祖宗)은 무로마치 막부의 어용화가인 가노 마사노부(狩野正信, 1434?-1530)로 그는 무려 96세까지 장수한 화가입니다. 그의 화풍은 중국풍으로 특히 남송(南宋) 회화의 영향이 짙게 나타나는데, 특히 절파(浙派)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노파가, 중국 회회사에서 가장 시적(詩的), 귀족적, 개성적 화풍인 절파를 수용한 것인데, 이 구스미 모리카게의 화풍이 고쿠다니야끼의 유상채 시문에 직접적으로 짙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절파 양식의 회화가 처음으로 도자기에 도입되었고, 이는 황가와 막부, 다이묘들에게 큰 관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 일본 국보:고쿠다니 유상채(이로에) 대나무팔가조문 큰접시(古九谷色絵竹叭々鳥文大皿), 17세기作, 입지름42.7 높이9.3cm, 동경국립박물관 소장(사진 출처 URL https://emuseum.nich.go.jp/detail?langId=ja&webView=&content_base_id=100523&content_part_id=0&content_pict_id=0)  팔가조[叭哥鳥, 일본에서 하하초(叭叭鳥, 哥哥鳥)라는 별칭도 사용)는 중국 남방에 사는 까마귀의 일종으로 효도를 하는 새로 알려져, 혼인, 출산 등의 축하 의미로 그려진 그림. 위 작품은 자수성가한 저명한 사업가 시오바라 마타사쿠(塩原又策, 1877-1955)가 수집한 것으로, 그의 아들이 동경국립박물관에 기증. 굽 가운데 관지가 있으나 여기에 녹색안료를 칠하여 판독불가 상태. 대개 ‘복(福)’가 많다.

위 작품에서 가노파 회화 양식이 보이지는 않습니다. 대개 산수화에서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일본도자사와 한중 도자사에서도 보기 힘든 대담한 구성과 강렬한 채색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중국 명대의 선덕제(宣德帝 재위 1425-35) 시대의 접시 형태처럼 넓은 굽, 굽 자체가 아주 날씬하며 직각이고, 굽 안쪽 전체까지 모두 시유되어 있습니다. 또한 무엇을 놓고 구웠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바닥에 닿는 굽의 면이 깔끔합니다. 설명 드린 이런 요소는 도자기의 연대와 유형, 작품성, 소성가마 판독 등에 유용한 ‘팩트체크’ 사항입니다.

한 작품만 더 보고 가죠.

  •  고쿠다니 오와테노송문 평발(古九谷靑手老松図平鉢), 17세기作, 입지름42.8 고9.7cm,  이시카와현미술관(石川縣美術館) 소장 및 사진. 뒷면 문양은 구름 모양이며 관지는 “복(福)”. 소나무는 장수(長壽)와 절개를 상징하는데, 소나무 모양을 ‘수(壽)’ 형태로 디자인한 듯 보인다. 

위 작품을 오와테(靑手)라고 부르는 것은 청, 황, 자(紫), 감청(紺靑) 총 4가지 색상을 사용한 것에 대한 명칭으로 붉은 색(赤)을 빼고 시문하였다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직경이 무려 약 43cm에 달하는 큰 접시 표면에 소나무가 정말 대범하게 가득하고, 그리고 그 위에 채색을 진하게 채워 넣었습니다. 접시를 십(十)자로 분할하면, 무게가 우측이 무겁게 그려졌습니다. 이것이 절파의 구도의 특징입니다. 또한 소나무 솔잎 뭉치를 눈송이처럼 뭉치게 묘사하고 솔가지를 급격하게 꺽게 그리는데, 이것도 절파 회화에서 소나무 묘사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절파는 여백의 미를 잘 살리는데 반해 여기서는 여백에 특이한 문양을 빼곡히 채워넣어, 빈 구석을 찾기 어렵습니다. 이런 묘사를 양식적 묘사라 하는데, 유럽인들이 좋아하고 일본인들이 특히 좋아하는 유형입니다.

대략 1700년경 정확한 사유는 알려지지 않은 채, 전체가 폐요가 되었습니다. 막연한 추측으로는 고쿠다니야끼의 밀무역 의심을 받게 되면서 번측에서 급작스럽고 전격적으로 가마들이 폐쇄했다고 합니다. 밀무역은  막부에 대한 반역행위에 가까운 범죄로 여겨 발각시에는 가혹한 처벌이 예외 없이 이루어졌습니다.   

재부흥은 가가번 차원에서, 아오키 모쿠베이(靑木木米, 1767-1833)와 그의 조수를 1807년에 교토(京都)에서 초빙하였습니다. 아오키와 조수는 현재 가나자와시(金澤市)의 가스가야마(春日山)에 가마를 건설하였는데, 이를 가스가야마가마(春日山窯)라고 합니다. 가스가야마가마를 필두로 하여, 그곳과 관련된 도공들과 여러 인물들이 함께 개성 넘치는 가마들을 개요(開窯)와 폐왜(廢窯)의 부침들이 일어나면서 구다니야끼의 명성이 일본 전역으로 점차 퍼져갔습니다. 메이지유신 이후에는 해외수출이 활발해서 서구에도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또한 ‘구다니(九谷)’이라는 명칭으로 많은 제자들이 요업을 성공적으로 진행하여 구다니의 명성은 현대까지 계속 이어졌습니다.  

5. 가키에몬(枾右衛門)

가키에몬 양식은 17세기 후반의 히젠자기의 일정한 양식을 지칭하는 총칭입니다.

서구문화에서 최초의 일류(日流)라고 부를 문화 충격을 준 것은 가키에몬 자기입니다. 이것은 중국 자기가 준 문화 충격의 부수 효과에 불과하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여진은 꽤 길어서, 18-19세기의 유럽 전역의 모든 자기에서 가키에몬의 스타일을 흔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이마리도자기의 포장지로 사용된 일본 다색판화들이 19세기 후반 인상파를 포함한 유럽의 회화에 깊은 영향을 끼친 것은 유명한 사실입니다.

중국에 의해 완성된 유상채 기법이 일본으로 전파되어 얼마나 더욱 세련되고 우아하게 발전했는지 이 가키에몬 도자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가키에몬의 여러 문양과 중국 자기 문양과의 관계, 조선 도자의 영향, 유럽으로의 전파와 변형 등은 애호가나 학자들에 흥미로운 주제이기도 합니다.

  • 가키에몬야끼(Kakiemon), 바위대나무매화새문 접시(Dish with rocks, bamboo, prunus and birds), 17세기, 크기미상, 네덜란드 암스테르박물관(Rijksmuseum)소장 및 사진. 동 시대에 유럽으로 수출된 작품. 유려하고 우아한 오채 색상에 여백을 살리기 위한 편벽한 구도로 시문한 것이 특징. 장수/축하/기쁜 소식 등의 뜻을 담고 있다.
  • 설탕통(Suga Bowl), 프랑스 샹티이 자기제작소作(Chantilly Porcelain Factory), 18c, 입지름4.8 높이7.4cm, 클리블랜드예술박물관(CMA:The Cleveland Museum of Art) 소장 및 사진. 박물관의 제목을 그대로 명기. 설명문에 가키에몬 형식이라는 것을 명기. 아주 작은 기물. 가케에몬의 시문은 여백미를 살리는 것이 핵심이며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우아한 기품을 지니는 문양과 기형.

가키에몬은 사카이다 가키에몬(酒井田枾右衛門, 1596-1666)에서 시작되었는데, 사카이다가문은 비젠국의 이웃인 지금의 후쿠시마현(福岡縣) 야메시(八女市) 지역의 호족(또는 영주)이었는데, 1582년 비젠국의 영주인 류조(龍造寺)씨와 전투에서 패하여 그 결과 인질로 가키에몬의 부친 사카이다 엔세(酒井田円西, 1573-1651)가 들어왔습니다.

류조씨가 몰락하고, 1616년 이삼평이 도석을 발견하여 자기 생산의 역사적 태풍이 사가번에 몰아치니, 아마도 인질 신분에서 풀려난 사아키이다 엔세는 본국으로의 귀국길도 막힌 듯 합니다. 1626년 거주지였던 시로이시향(白石鄕:현 나카사키현 시로이시향)에서 조선인 도공 다카하라 고로시치(高原五郞七, 생몰미상)을 초빙하여 그에게 4년간 도자기 제작 기술을 사사 받았습니다. 아마도 부자 모두가 열심히 배운 듯 합니다. 1635년 15km로 북쪽의 아리타(有田)로 이주를 단행합니다.

1637년 사가번의 명령에 의해 아리타의 도자기 업자 800여명이 추방되고, 아리타에는 요장이 13개소로 통합 정리되었습니다. 이는 땔감 문제가 핵심으로 특히 산림보호가 중요한 목적이었습니다. 살아남은 요장 대다수는 조선인 도공과 연관된 가마였습니다. 이 때 가키에몬 가족은 추방당하지 않고, 계속 도자기 작업을 지속하여 1643년에는 오채 기법, 1658년에는 금과 은을 도포하는 기법까지 성공합니다.

1661년 나베시마 어용가마와 가키에몬 가마가 모두 난가와라산(南原川山)으로 옮겼습니다. 이때부터 서서히 일본 전역으로 명성을 얻게 되고, 해외 수출도 이루어진 듯 합니다. 필자가 계속 추정하듯 말씀드리는 이유는, 한중일 모두 도자기에 대한 역사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일본이 좀 더 문헌이 더 있지만, 극히 빈약한 이웃 국가에 비해 조금 더 있을 뿐입니다. 그 이유는 당시의 한중일 도공들이 대다수 문자 해독을 하지 못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므로 주변 조력자들도 문자 해독을 하지 못했을 겁니다. 간략한 숫자, 쉬은 글자, 이름자 정도만 알았을 겁니다. 1690년대 이후 18세기부터 데라코야(寺子屋)라는 10대 초반을 위한 사설교육기관이 농어촌까지 퍼지면서, 일본도 문자를 해독하는 백성들이 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중등교육기관으로 335개소의 국립 학교인 향교, 사립인 서원(정조시기 650곳), 기초교육을 담당하는 수많은 서당까지 갖추어진 18세기 조선의 교육 체계와는 비교 자체가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세기 이후 조선 도공들도 남긴 문헌은 전무(全無)합니다. 지금 논의되고 있는 한일 도공들은 모두 16-17세기 인물임을 염두에 두고 보시죠.

1672년 다시 사가번에서 아리타지역에서 요업은 180호만 허가하고, 오채(유상채)까지 할 수 있는 가마는 11곳으로 결정하였고, 가키에몬은 여기에 포함되었습니다.

1670년대부터 문헌에 아주 드물게 가키에몬이 등장하는데, 이는 가키에몬이 난가와라산으로 이주한 후부터 체계적 생산체제를 갖추고 영업을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1725년 독일 마이센(Meissen)이 유상채 기법을 처음 성공하면서 유럽각국에서도 자기 소성에 성공하면 가키에몬의 모방작들을 제작되었습니다.

가키에몬은 1대~4대 사이를 초기, 5~7대를 중기, 8~10대를 후기(7~10대까지는 생몰연대가 미상), 11대부터 근대로 시대 구분을 합니다. 11대 가키에몬(1839-1916) 시절에 메이지유신이 있었고, 12, 13대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5대(1660-91) 때에는 기량이 떨어져, 나베시마번주에게 납불 불가를 통보받아 가마가 존폐위기까지 빠졌으나 숙부의 도움으로 부흥했다고 합니다. 현재 15대 가키에몬이 활동하고 있으며, 사카이다 가키에몬(酒井田枾右衛門)은 습명(襲名)되어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출처 – ㈜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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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한 중국도자와 일본도자사 글의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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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의 위키피디아(Wikipedia)에서 여러 항목을 검색하여 인용

한국판 https://ko.wikipedia.org/

미국판 https://en.wikipedia.org/

일본판 https://ja.wikipedia.org/

중국판 https://zh.wikipedia.org/


[1] 야베 요시아키(1943-) 가나가와현(神奈川県) 출생. 도호쿠대학(東北大学) 미술사학과 졸. 동경국립박물관 학예사, 공예과장으로 퇴직. 14권의 도자기와 다례에 관한 책을 출간한 전문가.